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누엘 2세 (문단 편집) === 망명 후의 행적 === 마누엘은 어머니가 태어난 런던 트위크넘의 풀웰 파크에 거주하면서 지역 사회 활동에 열심히 참여했으며, 트위크넘의 성 제임스 성당에서 열린 [[미사]]에 참석했고 여러 자녀의 대부가 되었다. 그러면서 무력으로 공화정부를 무너뜨리고 왕정을 복구시키려는 왕당파의 움직임에 "그것은 포르투갈을 파괴하는 짓일 뿐이다"라며 반대하면서, 오직 협상과 국민 투표를 통해 재집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부 왕당파 인사들은 자신들에게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않는 그를 불신해 [[미겔 1세]]의 후손들을 국왕으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마누엘은 이를 눈치채고 미겔 1세의 후손들과 직접 담판을 보기로 하고 1912년 도버에서 미겔 자누아리우 드 브라간사와 회담을 가졌다. 그러나 이 회의의 결과가 어찌 나왔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마누엘 2세 본인은 미겔이 자신을 포르투갈의 왕으로 인정하는 대가로 미겔 1세 후손의 왕위 계승권 영구 박탈을 취소하며 잃어버린 포르투갈 시민권을 부여하겠다는 합의를 맺었다고 주장했지만, 미겔이 회담 이후에도 포르투갈 국왕 '미겔 2세'를 여전히 자처한 것을 볼 때 신빙성이 떨어진다. 역사가들은 공화국에 대한 투쟁 방식에 대해 대체로 합의를 맺었지만 승계와 관련한 문제는 합의를 보지 못했으리라 추정한다. 그러던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마누엘은 포르투갈에 영국과 힘을 합쳐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왕당파에게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왕정을 복구시키려는 노력을 중단하고 공화정부에 협조하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다수의 왕당파는 공화정부 수립을 방조한 영국을 불신했고, [[빌헬름 2세]]가 승리한다면 왕정을 회복할 길이 열릴 거라 여기고 독일을 지지했다. 한편, 마누엘은 이 참에 전쟁에 참여해 공적을 세움으로써 영국 정부의 인정을 받기로 하고 영국 정부에 참전 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영국 정부는 그를 위험한 전선에 투입시키지 않기로 하고, 대신 영국 [[적십자]]에 참여하게 했다. 그는 처음에는 실망했지만, 막상 적십자에 배속된 뒤 기금 모금, 병원 방문, 최전선의 부상병 방문 등 직무에 최선을 다했다. 그러면서 전투 도중에 흉터가 생긴 병사들을 치료하기 위해 스티븐의 부시 병원에 정형외과 부서를 창설하는 데 기여했다.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19년, 조지 5세는 승리 축하 행사에 그를 초대해 그동안의 공헌에 감사를 표했다. 1926년, 오스카르 프라고소 카르모나 장군에 의해 고메스 다 코스타 정부가 전복되었다. 이후 코스타는 런던 주재 대사로 임명되었지만, 영국 정부는 그의 신임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포르투갈 외무부는 영국에 대한 포르투갈 부채 청산을 협상해야 했는데 대사가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에 난처해 하다가 마누엘에게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마누엘은 조국을 도울 기회가 주어진 것에 기뻐하며 조지 5세 등 여러 인사들과 접촉해 코스타를 대사로 인정해달라고 호소해 끝내 관철시켰다. 또한 그는 유언장에서 자신의 재산을 포르투갈로 이전해 불우 이웃 구제에 쓰겠으며, 자신이 죽으면 포르투갈에 묻히겠다고 밝혔다. 마누엘은 망명 기간 동안 포르투갈의 중세 및 르네상스 문학에 관한 논문을 작성하는 등 문학 연구에 전념했다. 또한 포르투갈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처음에 [[전기물]]을 쓰는 데 관심을 가지고, 포르투갈 국왕 [[마누엘 1세]]가 다른 역사가들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여기고 그에 관한 전기를 집필했다. 그러다 1926년부터 전기물에 대한 관심을 접고 1489년부터 1600년까지의 기간 동안 출간된 포르투갈 문헌들을 수집한 <포르투갈 고대 문헌집(Livros antigos portuguezes)> 3권 집필에 착수했다. 1489년부터 1539년까지의 문헌들을 모은 제1권은 1929년에 출판되었다. 마누엘은 이 저서를 윈저 궁으로 가지고 가서 조지 5세에게 직접 전달했다. 이 저서에는 포르투갈 역사를 다룬 2개의 연대기, 5개의 팜플렛, 33권의 문학 작품이 담겨 있었다. 평론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은 마누엘은 1540년부터 1569년까지 이어지는 제2권 집필에 바로 착수해 1932년에 완수되었다. 그러나 그는 제3권 집필에 착수하기 직전에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사후에 도서관 사서인 마저리 윈터스가 제3권을 출판했다. 그는 이 작품들로 인해 포르투갈 역사가들의 존경을 받았고, 그의 흉상이 리스본 국립 도서관 입구에 세워지는 계기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